1 왕립학교시절 꽤나 유명했던 피아노 그 선배가 사랑하지도 않는 사내와 혼인하여 왕실의 대비가 되어있음을 뒤늦게 알게 된 어느 후배. 우연히 방문한 궁에 가서야 다시 이어지는 인연의 아이러니란.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무작정 궁에 발을 내딛는 한유. 예전의 그 부드러움은 한데 사라지고 냉기를 품고 있는 이랑. 대체 이 무슨 무례입니까. 알현도 없이 함부로 드나드는 곳이덥니까, 이 곳이, 라는 이랑에도 굴하지 않고 안본 사이에 많이 수척해지셨습니다 마마, 라기에 되려 당황하는 이랑.

2 한유 학창시절에도 유명했을 것만 같은 느낌. 그래서 윤이랑 키링이냐고, 혹은 무슨 여자가 여자 좋아하냐고 놀리는 동급 남학생들에게는 늘 나 정도는 되니까 키링이라도 하는 거야, 사랑에 성별이 어디 있니. 고지식해선 라고 맞받아치기 십상. 그 말 듣고 남몰래 웃음 터지는 선배 이랑 보고싶다.

3 왕립 학교 시절 꼬박꼬박 유야, 한유 불러주던 이랑인데 대비 되고 나선 어쩐지 더 차분해지고 별 감흥 없이 그렇습니까, 그렇군요 라며 어딘가 속이 텅 빈 사람 마냥 반응하는 이랑에 윤씨 가문이 어떤 가문인지 이미 다 알기에 꽃처럼 사는 법을 배웠구나 선배, 라며 속으로만 삭히겠지.

가끔 한유가 성희주랑 붙어있을 때면 이랑이 한유 흘겨보는 데 이런 것도 관심이라고 마냥 즐기는 뻔뻔함이 주무기인 여후배는 또 어떤지. 그걸 알면서도 내치지는 못하고 또 한편으로는 변한 건 나뿐이고, 너는 그대로구나 싶어서 그게 오히려 위안이 되기도 하는 이랑도 좋고.

4 둘이 어쩌다 한 번씩 기싸움도 하면 좋겠다. 아무리 내가 아꼈던 후배라고는 하나, 이리 자꾸 왕실의 질서를 어지럽힌다면 결코 가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하는 궁 안주인이라던지. 아니면 그대는 내가 군부인을 그리 적대시 하는 걸 다 알면서도 자꾸 곁을 주려는 속셈이 뭡니까 하는 이랑이라던지.

그러면 한유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굴었으면 좋겠고. 어쩔 때는 그게 보기 싫어서 일부러 별궁에 부르고 하는 이랑 알면서도 허나 제가 좋아하는 건 마마십니다. 그게 더 중요한 거 아닙니까. 그리고 의외네, 질투도 할 줄 알고. 궁이 외롭긴 한가봐요 마마 하면 또 속타는 건 언제나 이랑일듯.

너는 내가 대체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 거니. 대체 언제까지...... . 속으론 이러면서 장본인 앞에서는 또 침묵할 것 같아.

5 한유 때문에 매번 골머리 앓는 임상궁 생각나네. 궁 안에서는 금연입니다, 한유 님 어서 담배를 끄시지요, 아실 만한 분이 자꾸 왜 이러십니까 잔소리 하면 내가 이래서 왕실이 싫어 하고 대놓고 중얼대는 안하무인 그 후배.

임 상궁, 밖에 누구 있는가. 하는 이랑의 음성이 나직히 들리면, 아닙니다. 마마. 하며 얼른 가라고 손짓 하는데 보란 듯이 문 똑똑 두드리는 누구 덕에 한숨 쉬는 임상궁이랄지. 다음부턴 직무 중이니 오지 말라고 전하게 하며 궁 출입 제한 시켜버리는 이랑이랄지. 그런다고 포기할 한유겠냐마는.

성희주 왈 야, 그럴거면 그냥 고백을 해. 그러면 웃으면서 그건 재미없고. 하는 통에 어쩌라는 건지 라며 얼척 없음 표정 짓는다고도…

6 몇 없는 제 편, 그들 중 하나가 한유였으면. 그래서 일부러 자신 때문에 위험해질까봐, 또 욕심인 것 같아서 매몰차게 구는데 실은 누구보다 계속 곁에 있었으면 싶은 게 이랑의 본심 아닐까.

7 왕립학교 시절, 유와 이랑을 이어준 유일무이한 매개체는 단연 음악일 듯. 피아노를 치던 유와 이랑이 가장 행복했을 때니까. 드뷔시의 달빛이라는 곡을 유독 좋아했던 유라 이랑에게 자주 연주해달라고 졸랐겠지.

이랑 또한 유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을 때의 그 음악과 사랑에 빠진 모습을 좋아했을 거야. 둘이 같이 피아노 연습도 자주 했을 것 같고. 젓가락 행진곡 같은 것도 놀이 삼아 둘이 같이 치고. 먼 훗날, 한 사람은 궁 내에서 즐기는 유일한 취미로만 그치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삶이 되겠지.

두 사람이 다 성인이 되고 피아니스트가 된 유가 이랑에게 선배가 좋아할 거라며 독주 연주회 티켓을 건네주러 왔는데 이랑은 그저 곁눈질로만 보겠지만. 결국 너무 시끄러워질까봐 최소한의 경비대를 대동 하여 친히 그 연주회장인 아트홀에 행차하시는 대비마마랄지.

8 여름 청레로 한유이랑. 무더운 날씨 속에 인류애가 소멸되기 일보 직전 어디선가 아이스크림 두 개를 들고와선 하나는 제 입에 물고 다른 하나는 이랑의 입에 물리는 게 보고 싶어. 이랑이 눈 동그래져서 갑자기 무슨........ 하는데 날이 덥잖아요, 이런 거라도 있어야 살지. 안 그래요? 하는 한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