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작가들은 죽는다. 최근 내가 아끼는 이들 중 가에탕 수시(Gaetan Soucy)와 크리스티앙 가이이(Christian Gailly)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들이 어둠 속으로 합류하는 만큼 모든 빛이 그들의 작품 위로 쏟아지기를 바라게 된다. 서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작가의 글을 읽는 것은 특히나 강렬한 경험이다. 그는 아직 이 세상을 완전히 떠나지 않았기에, 우리는 페이지 위에서 그의 문장들이 태어나는 것을 거의 실시간으로 목격하면서도, 그의 말은 이미 죽음이 부여하는 권위와 무게, 그리고 고결함을 지니고 있다. 너무나 순진하거나 감상적이지 않더라도 이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죽음 그 자체를 작품의 부가가치로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그것은 작품의 끝이자 곧 완성을 의미한다. 작품은 닫히고 그 의미는 비로소 전개된다. 작품은 자질구레한 개인사로부터 해방되고, 더 이상 저자의 허영심에 대해 해명할 필요가 없으며, 그 자체로 존재하게 된다. 만약 작품이 하찮은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그것들은 금방 먼지로 돌아가겠지만, 지속될 가치가 있다면 그 마침표 직후에 그 이유가 우리에게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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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목숨을 끊기 며칠 전, 차갑게 《자살(Suicide)》이라 제목 붙인 그의 네 번째 책이자 마지막 책을 출판사에 건넨 에두아르 르베(1965-2007)의 짧은 작품 세계 역시 그러하다. 이보다 더 일관되기도 힘들 것이다. 에두아르 르베는 사진 작업으로도 이름을 알렸는데, 중립성을 가장한 그의 아이러니가 지닌 비판적 형태는 잔인할 정도로 효과적임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옷을 입고, 심지어 우아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성인 영화(X등급)의 모든 자세와 인물들을 흉내 내는 그의 <포르노그래피(Pornographie)> 연작을 떠올려보자. 이는 당연히 해당 장르에 대한 도덕적 규탄이 아니라, 포르노 영화가 그 표현을 몰수하고 모델화함으로써 우리에게 면죄부를 주었던 판타지들을 역설적으로 벌거벗겨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유익한 어긋남을 아주 좋아했던 에두아르 르베는 유명 도시들의 이름을 딴 미국의 도시들(파리, 로마, 제리코, 바그다드)을 촬영하기도 했고, 전화번호부에서 찾아낸 예술가들과 동명이인인 사람들의 초상화(앙드레 브르통, 앙리 미쇼, 이브 클랭, 외젠 들라크루아)를 찍기도 했다.

출간 후 8년이 지난 지금, P.O.L 출판사는 에두아르 르베의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임에 틀림없는 《자화상(Autoportrait)》을 포켓북 총서로 재출간하는 훌륭한 생각을 해냈다. 첫 문장이 그 톤을 잡아준다. "청소년기에 나는 《인생 사용법》이 내게 사는 법을, 《자살 사용법》이 내게 죽는 법을 가르쳐 줄 것이라 믿었다." 이제 우리는 에두아르 르베라는 이름을 가진 한 개인의 기능 방식을 상세히 기술한 일종의 긴 안내서를 읽게 될 것이다. 그의 신체적 묘사부터 그를 스쳐 지나가는 평범하거나 독창적인 생각들, 그의 취향, 그의 경험에 이르기까지, 그러면서도 온갖 형태의 과시나 유약한 자기만족, 혹은 반대로 참회 같은 것은 철저히 배제한다. 자신을 스스로 꼿꼿이 붙잡은 채 도망치려 하지 않는 한 인간 전체가 우리에게 온전히 인도된다.

따라서 이 책은 사실과 관찰들의 나열로 이루어져 있으며, 1인칭으로 쓰인 이 텍스트가 지닌 진실(혹은 정확성)에 대한 요구는 그 자체로 하나의 문학적 프로젝트를 이루지 않았다면 흡사 경찰관이 조서 양식에 두 손가락으로 툭툭 쳐서 타이핑했을 법한 성질의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전문가가 되려고 노력한다." 기록들은 저자의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연이어 이어지는 듯하지만, 평범함과 기이함이 끊임없이 충돌하며 차가운 유머 효과를 만들어내는데, 이는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우리를 얼어붙게 만든다. 내가 너무 재미있는 사람이라, 사람들은 내가 행복한 줄 안다. 나는 풀밭에서 귀 한 짝을 발견하는 일이 결코 없기를 바란다. 나는 망치나 나사보다 단어를 더 좋아하지 않는다.

이 책의 또 다른 큰 장점은, 세 가지 경험 혹은 세 가지 세계의 실들을 교차시키며 독서의 묘미가 극대화된다는 것이다. 먼저 저자 고유의 영역에 속하는 신체적 초상, 삶의 사건들, 그리고 어떤 일화들이 있다. 나는 앞발로 더듬으며 길을 찾던 맹인 코끼리의 등 뒤에 타고 황금 삼각지대의 협곡들 사이를 산책한 적이 있다. 그다음으로 공통의 모험이나 공유된 버릇과 행동에 속하는 것들이 있어, 독자는 때때로 저자와 완벽하게 의기투합하며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나의 경우에는: 외국의 도시에서 나는 늘 동물원에 가고 싶어지는데, 외국의 동물원이 프랑스의 동물원보다 더 이국적이지는 않음에도 그렇다.) 마지막으로, 자화상은 부정(Negatif)을 통해서도 그려진다. 나는 호주와 아프리카 대륙에는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다라거나 나는 뉴질랜드 사람과 대화한 기억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우리의 이해를 벗어나는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며, 의도나 직관 속에서 수렴되는 500개 이상의 가상 작품들을 구상했던 에두아르 르베(《작품들(Œuvres)》, POL, 2002)는, 우리가 그 안에서 사교계의 역할극 속에 가끔은 너무나 고분고분하게 흘러가는 다른 삶 못지않게 가치 있는 음화(陰畵) 같은 삶을 살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화상》에서 이 명징하고 빛나는 진술들 사이로 아주 가끔씩, 어쩌면 비밀 이야기처럼 들리는 수수께끼 같은 문장을 읽게 된다. 그때 우리는 스스로 삶을 단축했던 이 인생의 환원 불가능한 미스터리에 가까워진다. 나는 가끔 어두운 길을 따라 달리곤 한다.

에리크 슈비야르(Eric Chevillard), 《르 몽드(Le Monde)》, 2013년 11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