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수명을 다한 인공위성의 조각이 지면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으니 주의하라는 알람이 울렸다. 알림음을 끄던 중 오래된 뉴스 화면으로 송출된 여러명의 사람들이 건물에서 추락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은 화염이 끓는 건물의 가운데서 하늘로 튕겨져 나왔다. 그 모습은 자글거리는 화면 안에 천천히 하강하는 작은 점으로 남았다. 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이었으니, 화면은 아주 자글거렸다.
나는 여러가지 화면들의 대조로 나이를 가늠할 수 있었다. 며칠 전 발견한 캠코더에서는 이미 이사해서 돌아갈 수 없는 집 안을 촬영한 영상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흉내낼 수 조차 없는 숨소리가 함께 녹음되어 있었다. 촬영자는 집 구석의 벽과 바닥으로 새어나오는 빛을 오랫동안 기록했다. 메모리카드를 빼던 날 배터리가 부식되어 모니터로 하얀 가루가 튀었다. 우연의 축적과 기억이 충돌해서 생겨난 운석가루 같았다.
나는 실제 사건과 시각적 경험의 어긋난 관계를 믿는다. 둘의 시간은 언제나 불일치하며, 시각적 재현을 통해 사건을 설명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실패에 그치기에 아름답다. 나는 오래된 앨범에서부터 한 달 전의 파일까지 쌓여있는 사진들 속에서 특정 이미지를 솎아냈지만, 사실 내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잘 알 수 없었다. 사진은 과거를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의 과거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롯이 그 장면으로부터 출발해 시간을 써 내려가야 한다. 그러므로 무언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사건의 파생물이나 증거를 잡아내고자 하는 행위가 아닌, 그 자체로 사건이다.
따라서 누군가의 장면을 뒤섞는 것은 흥미롭다. 그것은 이야기를 지어내고자 하는 단순한 욕망에서 시작되며 ‘나’와 ‘너’, ‘여기’와 ‘저기’를 비논리적으로 엮는다. 교차가 반복되면 실제 사건의 과거는 사라지고 미래만이 남는다. 그 미래는 ‘나중’의 시점에서 과거를 예언하는 개인의 기도문 같은 것이다. 이때,
이야기는 산발적으로 이동한다. 영원히 묻어두고 싶던 사실이 잡담에서 튀어나오듯. 그런데 여기에 어떤 규칙이 있고 조건이 있겠는가? 그 우연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수밖에.
최근에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오늘 두 번째로 그 사람의 눈동자를 마주볼 수 있었다. 밝은 적갈색의 눈에 검은 동공이 선명히 박혀있는 눈이다. 그 눈을 바라보느라 손을 관찰하는 것에 실패했다. 나는 매일 그를 보기 위해 아이스커피를 들고 산책을 한다.
시력은 시각의 뚜렷함을 나타내며, 이는 눈 망막 초점의 선명함과 뇌의 해석 기능의 민감도에 영향을 받는다.
난시는 안구의 굴절 이상으로 인해 물체가 번져 보이는 상태를 말한다. 근시와 원시가 초점이 맺히는 거리의 문제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난시는 대게 안구 표면이 거칠어 반사가 한 점이 아닌 여러 점에 맺혀서 생기는 증상이다.
드라마에서 이별의 장면이 나온다. 배우의 뺨에 눈물이 흐른다. 함께 보던 사람이 배우의 눈, 코, 그리고 뺨 중 어느 곳도 붉지 않은 것을 보니 저건 인공눈물이라고 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인공눈물을 자연스러운 눈물처럼 보이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해 토론한다. 4년을 사귄 연인의 이별 이야기는 뒤로 하고. 나는 눈에 최대한 많은 인공눈물을 떨어트린 뒤 눈을 깜박이면 왈칵 쏟아져 나온 슬픔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함께 보던 사람은 그러면 너무 많이, 빨리 떨어져 눈물이 아닌 빗물처럼 보일 것이라고 햇다. 그러면서 그는 눈 앞이 흐릿해 보이는 표정을 짓는 것이 앞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눈물이 자연스러우려면, 울고 있는 사람의 눈동자가, 표정이, 그리고 시선이 흐릿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명백한 흐릿함을 위한 표정만이 슬픔을 머금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내가 울었던 적을 떠올리며,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짜디 짠 눈물을 가득 머금고 있으면 눈이 따끔해지면서 감겼고, 시야가 흐리고 어두워졌다. 그러면 그 흐릿함 탓에 더 짠 눈물이 나왔다.
하지만 얼마나 흐릿해야 흐리다고 할 수 있을까? 울고 난 뒤 눈이 따끔거리면 모든 풍경이 굴절되어있곤 했다. 굴절은 눈물방울의 왜곡된 렌즈와 따끔거림, 그리고 모든 것이 뒤섞여버린 감정 때문에 일어났다. 우리의 가시성과 가독성은 절대적인 거리감에 의해 흐려진다기 보단, 중요도를 가를 수 없는 것들에 의 해 교란된다. 어쩌면 명확한 읽기는 방해받기 위해 행해지는 것이며, 그 방해를 통해 비로소 개인의 응시가 된다.
당신은 아름다워. 꽃보다는 햇살처럼. 나는 당신에게 반했어. 한눈에, 그리고 서서히. 당신은 내 안으로 점점 스며들어와. 당신의 옅고 빛나는 갈색 눈동자를 처음 보았을 때 나의 입술이 당신 입술 바로 앞에 있었음 했어. 그렇게 느꼈어. 어수선한 그 곳의 소리와 빛이 아득해졌어. 비슷한 누군가를 본 적이 있었나. 아주 오래전부터 그 눈동자를 찾아온 것처럼, 그리고 마침내 찾아낸 것만 같은 느낌이었어. 깊은 답답함이 해소된 기분. 그 기분은 너무나 구체적이라 당신이라는 존재가 나의 시간 어느 순간에 붙어있도록 예정되었던 것만 같아. 사람들은 이걸 운명이라고 부르지. 당신도 내 눈을 보았지? 가까이서 몇 초, 멀리서 몇 초간.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꽤 오랫동안. 내 눈은 당신의 것보다 검었지? 그렇다면 당신은 답답했으려나. 나는 당신의 시선이 느껴지면 테이블로 눈을 내리고 머리를 쓸곤 했어.
시간이 무언가를 흐리기도 한다. 그것이 무언가를 가장 잘 흐린다.
언젠가 이마 위로 빗방울이 튈 테고 모든 것은 흩어져 가겠지.
나는 종종 외로움과 외로움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감을 헷갈리는 듯 하다.
결핍과 충족의 대비는 ‘무엇이 얼마만큼 끈끈하게 부착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기억은 부착의 감각으로 마음껏 생겨나고 조작된다.
그렇다면 기억의 효력은 어디까지 존재할 수 있을까? 사실은 기억이 전부다. 지금껏 우리의 대화는 모두 기억과 진술로 이뤄져 왔다. 기억과 진술의 교집합에서 생겨나는 현재는 오류를 껴안은 사건이고, 그러므로 지금 이 대화는 오류 투성이다.
언어와 시각의 영원한 불일치. 저쪽 세계와 이쪽 세계의 교집합. 옆에서 바라보니 사실 교집합은 아니었던 것. 어떤 것은 언제나 있고, 어떤 것은 가끔 흐른다. 그 ‘어떤 것’은 비어있는 대명사이므로, 사실 언제나 있는 것과 흐르는 것은 영원히 만나지 않는다.
인공위성이 추락한다고 한 날 나는 홍대 거리를 운전중이었다. 어쩌면 작은 위성 입자가 차창을 뚫은 뒤 나의 등허리에 박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 눈은 하얀 가루를 토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내 입 속 충치 개수를 기록했을 것이다.
언제 누가, 당신은 확신에 차보인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